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애슈턴 카터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[[펜실베이니아]] [[필라델피아]] 출신으로 [[에든버러 대학교]]를 다니다 [[예일 대학교]]를 졸업했고 학위는 중세역사학과 물리학으로 받았다. 로즈 장학금[* 영국의 식민주의자 세실 로즈의 돈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장학금.]으로 [[옥스퍼드 대학교]]에 진학해 공부했다. 물리학자로 [[SDI|스타워즈]](...) 연구를 하다가[* [[MIT]]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할 시절 SDI가 [[상호확증파괴]] 양극체제를 대체하기에는 기술적으로 많이 부족하다고 레이건 행정부를 비판하기도 했다.] 클린턴 정부 1기에서 국제안보정책부차관(Assistant Secretary of Defense for International Security Policy)로 [[국방부(미국)|국방부]]에 들어갔다. 그후 [[버락 오바마]] 행정부에서 다시 등용되어 군수차관(Undersecretary of Defense for Acquisition, Technology and Logistics)을 지냈고 이어서 국방 부장관(United States Deputy Secretary of Defense)도 지냈다. 이후 로버트 워크에게 부장관을 물려주고 공직을 떠났는데, 2014년에 [[척 헤이글]] 국방장관이 사임하자 후임자로 지명되었다.[* 당초 정책통으로 알려진 미셸 플루노이 전 정책담당 국방차관이 '미국 최초의 여성 국방장관'을 기치로 유력 후보로 거론되었지만, 본인이 사양하여 무산되었다. 사실 척 헤이글 국방장관 인선 당시에도 후보군으로 거론되긴 했으나 정치권 쪽에 연줄이 없다는 이유로 밀려난 적이 있다.] 위의 이력을 요약하자면, 전형적인 ~~공돌이~~기술통 출신의 국방관료라고 할 수 있다. 북핵 문제 등에서 북폭을 주장했고, 대북강경책이자 한반도통으로 꼽힌다. 이 점에서 클린턴 행정부 시절인 1990년대에 재직했던 [[윌리엄 페리]] 전 장관과 비교된다.[* 페리 역시 1970년대 연구개발 담당 관료로 미 국방부에서 경력을 시작했고, 스텔스 기술 등의 첨단무기 개발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기술통 출신이다. 1차 북핵위기때 영변 핵시설 공습을 검토했지만, 북한의 군사보복뿐만 아니라 방사능 유출 위험때문에 포기한 바 있었다. 이후 1998년 북한의 대포동 1호 시험발사 직후 미국의 대북정책 조정관으로 임명되었는데,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강력한 설득을 수용하여 북한에 대한 군사적 압박보다는 점진적 관계개선을 우선하는 '페리 프로세스'를 작성해냈다.] 실제로 카터는 클린턴 행정부 시절 국제안보정책 담당 국방차관보로 당시 장관이었던 페리를 보좌했고, 1990년대 말에는 역시 페리와 함께 <예방적 방위정책>(Preventive Defense)이라는 저서를 출간한 바 있다. [[조지프 던퍼드]]의 합참의장 인선을 적극 추진해 성사했다. 그의 주장으로 2016년 1월부터 [[미합중국 해군특수전개발단|DEVGRU]] 등 미군의 모든 병과가 여군에 개방됐다. 2022년 10월 25일 심장 질환으로 별세했다[[https://www.nbcnews.com/politics/politics-news/ashton-carter-former-obama-secretary-defense-dies-68-rcna53885|#]]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